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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300>배움의 가치

오늘로 칼럼 연재 마지막인 300회이며 1년에 걸친 장정이 끝났다. 지난 1년 간 스패니시 기본 회화와 아메리카 식민사 인디오 멸절사 흑인 잔혹사 중남미 독립사 미-멕시코 전쟁 등 다양한 역사칼럼을 써왔다. 독자들이 모두 스패니시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흥미를 끌만한 역사 칼럼과 같이 연재한 것이다. 지난 수년간 2개 일간지에 칼럼을 연재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만 쓸까 한다. 필자는 칼럼 이외에도 인문교양 모임인 '그라나다 클럽'에서도 10여 년째 인문학과 역사 강의를 하고 있으나 노력만큼 큰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한인들은 배우는 것의 가치를 몰라서 아무리 가르치려 해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추구하는 것은 돈뿐인 것같다. 돈은 의식의 성장과 정신의 진화 삶의 풍요와 품위를 위한 수단이 돼야지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살아온 사람의 노후는 추하고 죽을 때까지도 부질없는 물질에 대한 집착을 떨치지 못하고 추하게 죽는다. 그런 사람의 삶은 무가치하고 허무하다.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고 죽은 후에 맞이할 새로운 삶 즉 사후생에 대한 앎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런 죽음은 동물의 죽음과 별다를 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이 나이에 뭘 배우겠어?'라고 스스로의 삶을 허송하고 노화를 재촉하고 있다. 노화는 육체적 노화와 정신적 노화가 있는데 노력에 따라서 10년 내지 20년 정도 육체적 노화를 늦출 수 있고 정신적인 노화는 새로운 배움과 경험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절대로 다가오지 않는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통계상 한국인의 50% 이상이 85세가 되면 치매환자가 된다. 배움은 뇌의 시냅스를 증가시키고 뇌활동을 활발케 하여 알츠하이머 병(치매)를 예방한다. 죽을 때까지 전력을 다해서 배워라. <끝> ▶문의: (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6-19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299>미-멕전쟁2

미멕시코 전쟁 당시의 멕시코는 자유주의자와 연방주의자 간에 권력 암투가 내전 수준에 달하여, 외국과 전쟁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중앙정부에 무기와 병력을 보낸 주정부가, 한심하게도 전체의 절반 밖에 안됐다. 저희들끼리 싸우느라고 변변한 싸움 한 번 못해보고 깡통을 찬 것이다. 미국이 비록 수도인 멕시코 시티를 점령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남들이 다 보고 있는데, 남의 나라를 그냥 먹을 수는 없어서 적당히 종전조약을 맺은 것이 이달고(Hidalgo) 조약이며, 그 덕에 건진 땅이 캘리포니아를 위시한 멕시코의 서북부 영토다. 당시 빼앗긴 영토가 현재 멕시코 영토인 196만 평방km보다 훨씬 더 넓은 240만 평방km이며, 미국이 땅을 뺏으면서 국제사회를 의식한 체면치례성 대가로 멕시코에 지불한 돈은 그 영토 안에 사는 사람들이 저녁 한 끼씩 사먹을 수 있는 돈인 1500만 달러였다. 계산을 해보면 안다. 240만 평방km를 1500만 달러에 샀으니까, 평방km 즉 100헥트아르 당 6달러25센트에 산 것이다. 그래도 당시 그 돈이면 한 식구가 외식을 한번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미국은 자국 역사책에서 멕시코로부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한 치도 법에 어긋나지 않는 합법적인 거래로 구입했다고 가르치나, 멕시코의 역사책은 우리가 매우 아플 때 그 날강도들이 총을 대고 빼앗아 갔다고 가르친다. 이제 그들이 빼앗겼던 땅을 찾으러 캘리포니아로 오고 있다. 담 넘어서 말이다. 현재 캘리포니아 인구의 40%, 전 미국 인구의 18% 정도가 라티노이며,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라티노 인구는, 불법체류자를 포함해서 무려 5500만 명에 달한다. 그들과 서로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의 언어인 스패니시를 배워라. ▶문의: (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6-18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298>미-멕전쟁1

텍사스인들은 알라모 전투 승리 후 곧바로 헌법을 제정하고 승리의 주역인 군사령관 휴스턴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텍사스의 독립을 승인한 미국이 상황을 즐기고 있던 중, 텍사스가 미국과의 병합을 요청하자 마지못하는 척 이를 받아들었다. "달라는 대로 주고 사려고 했는데, 이게 웬 횡재냐?" 텍사스 병합을 결정한 11대 미국 대통령인 포크가 꿈 속에서 한 말이다. 그동안 미국은 여러 번 멕시코에 텍사스 매입을 제의했으나 매번 거절당했다. 미국이 제시한 매입 액수는 겨우 500만 달러였다. 현재 텍사스는 한국 면적의 무려 일곱 배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미국의 2번째로 큰 주다. 1846년 어느 날 미국대통령으로부터 멕시코 대통령에게 직통 전화가 걸려왔다. 미 : "안녕하시요? 그간 어떻게 지내셨소? 그래 많이 아프시다던데 어떻습니까?" 멕 : "예, 좀 좋아졌습니다, 그래 무슨 일입니까?" 미 : "요새 특별히 바쁜 일 없으시면 우리가 사절단 하나를 파견하려고 하는데 잘 좀 부탁합니다." 멕 : "아니 별안간 무슨 사절단입니까?" 미 : "댁의 나라 영토 일부를 좋은 값을 드리고 사려고요." 멕 : "아니 어디 아프십니까? 땅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당장 끊어요." 미 : 아니, 다 사겠다는 것도 아닌데…. 멕 : (뚜뚜뚜) 물론 당시 전화가 아직 없었을 때니까, 대개 이런 내용이 미국과 멕시코 간에 오고 갔다. 당시 힘이 넘쳐나는데다, 제국주의 겉멋에 물이 들어 한참 설치던 시절의 미국인지라 즉시 멕시코에 육군을 파병하여 몇 달 안돼서 멕시코 시티를 점령했으며, 미 태평양함대는 캘리포니아를 점령했다. ▶문의: (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6-17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297>알라모 전투와 텍사스의 상실

멕시코에게 통한의 땅인 텍사스는 19세기 초반부터 미국인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당시 텍사스는 멕시코의 코아우일라(Coauila) 주의 소속 영토였다. 미국은 벌써부터 그 땅을 탐을 내어 잭슨과 애덤스 대통령 시절부터 매입을 제의했으나 멕시코로부터 번번히 거절당했다. 1830년이 되자 목화 재배가 적당한 이 비옥한 평원에 2만명 이상의 미국인이 거주하게 되었다. 흑인 노예 수천명도 그들을 따라와서, 미국인은 인구면에서 멕시코인을 앞지르게 됐다. 미국인들은 목화 농사를 지으려고 텍사스에 왔고 목화 농사를 지으려면 흑인 노예의 노동력이 꼭 필요했다. 그런데 당시 멕시코는 1824년부터 노예제도를 금하고 있었고 미국은 노예제 폐지 선언 전이었다. 노예 소유가 법적으로 문제가 되자, 텍사스 거주 미국인들은 아예 멕시코에서 탈퇴하여 딴 살림을 차리기로 작정하고 1835년 독립을 선언했다. 론스타 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자 멕시코는 산타 안나를 지휘관으로 6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산타 안나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트라비스 대령이 겨우 187명의 병력을 이끌고 방어 중인 산안토니오의 알라모라는 이름의 한 선교본부를 공격했다. 소수의 미군 병력은 무려 10일 간을 버티며 저항했으나 전멸했다. 알라모 함락 직후, 텍사스군 사령관인 휴스턴 장군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승리로 방심한 멕시코군을 기습했다. "알라모를 기억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달려드는 미군에 의하여 전투는 단 20분만에 종료됐다. 수백명의 멕시코군이 전사하고, 수백명이 포로로 잡히는 동안, 텍사스군의 사망자는 단 9명뿐이었다. 산타 안나는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도 대패한 데다 자신 역시 포로가 되어 미국으로 이송되었으며, 텍사스의 독립을 약속하고야 풀려나 멕시코로 돌아왔다. ▶문의: (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6-15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296>정신병자 산타 안나

좌우간 멕시코가 불운했는지 이상한 인간이 권력의 정상에 오른다. 대담하고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데다 배우 기질이 농후하며 교활한 플레이보이이자 어설픈 전투에서나 두각을 나타냈던 산타 안나(Santa Anna)라는 인간이 이투르비데 실각 후의 혼란을 틈타 1833년부터 1853년까지 20년 간 무려 열한 번이나 대통령을 했다. 투계꾼에 엄청 여자를 밝혔던 이 인간이 도대체 몇 번이나 대통령을 했는지 헷갈려서 멕시코 사람들도 잘 모른다. 권력을 뺏은 적도 있었고 추대를 받은 적도 있었으며 잘 안 되면 자작 쿠테타까지 일으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집권 기간도 대강 산출한 것이고 대통령도 '9번이다 11번'이라고 말이 많다. 하여간 자신의 집권 기간 중 국제적인 분쟁에 잘못 대처해서 국가적으로는 막대한 손해를 입혔으나 그 때마다 용케 재기하여 끝까지 속을 썩혔다. 하여간 멕시코는 잊을 수 없는 수많은 치욕을 당한다. 텍사스를 뺏긴 데다 1846년 미-멕시코 전쟁의 패배로 현재의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콜로라도 네바다 유타 뉴멕시코 주 등 국토의 60%나 되는 240만 평방km를 미국에 빼앗긴다. 정의 같은 건 없고 굳이 의미를 붙이자면 힘 센 놈들의 모든 행위는 다 정의고 약한 놈들의 행위는 다 불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것이다. 미국은 고의적으로 전쟁을 유발하고 땅을 빼앗고 교과서를 고쳤다. 멕시코와 서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협상 끝에 그 240만 평방km의 거대한 영토를 1500만달러에 구입했다고 기술했다. 당시 1500만달러가 비록 적은 돈은 아니었으나 그 액수는 멕시코가 빼앗긴 땅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하루 저녁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정도다. 그 후 리오 그란데강에 생긴 새로운 국경은 수많은 멕시코인들의 상처로 남게 되었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6-14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294>멕시코의 독립3

이달고 신부와 모렐로스 신부의 봉기 실패 10년 후인 1821년 반란군 진압사령관인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in de Iturbide)가 왕실군 2500명을 이끌고 모렐로스의 잔당과 대치 중이던 12월 '이괄라 계획(Iguala 온건한 형태의 독립 선언으로 게릴라들과 끄리오요들의 지지를 동시에 끌어낸 선언)'을 발표하고 총뿌리를 꺼꾸로 든 다음 한편으로는 왕실군과 전투를 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페인 식민당국과 협상으로 정권을 이양받게 된다. 당시 스페인 식민정부는 현지 주둔군의 숫자가 미미한데다가 본국의 증원군을 기대할 수 없어서 거의 전투를 포기하고 정권을 이양했다. 식민지를 통치하는데 꼭 많은 병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수억의 인도를 통치하던 본국 파견 영국인들은 1000명에 불과했고 인도네시아를 통치한 네델란드인은 겨우 200명 정도였으며 조선을 식민지로 병합한 일본이 조선에 주둔시킨 병력도 2만이 채 안 되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800만이 넘었을 것이다. 1822년 정권을 잡은 이투르비데는 뒷골목 여기 저기 돈 봉투를 뿌려 장삼이사들로 하여금 위대한 이투르비데가 황제에 즉위하기를 원한다고 소리지르고 다니게 만든 뒤 국민의 염원(?)에 따라 황제에 즉위하나 1년도 못 채우고 반대파에게 잡혀 처형된다. 이투르비데의 집권 기간 동안 재미 있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이투르비데는 자기 나라 아랫 동네인 지금의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니카라과 코스타 리카등을 멕시코와 통합하도록 강요했다. 힘 없고 빽 없는 소국들은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은 채 별 수 없이 통합에 따랐으나 이투르비데가 실각하자마자 멕시코로부터 떨어져 나와 중앙아메리카연방이라는 독립국을 세웠다. 하지만 통합 18년 만인 1840년 지금의 중미 국가들로 나뉜 것이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6-13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294>멕시코의 독립2

이달고가 이끄는 농민군은 "과달루페 성모 만세! 악독한 정부여 물러가라! 가추삔(Gachupines 당시 중남미 거주 스페인인의 비하 호칭)에게 죽음을!" 이라는 구호를 외쳐가며 광산촌인 과나후아토(Guanajuato) 시로 진군했다. 그들은 과나후아토시의 거리를 휩쓸며 눈에 띄는 백인들을 모조리 살해하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끄리오요(criollo: 중남미 출생 스페인계 백인)들은 반란군에게 등을 돌린 채 왕실군과 협력하여 폭동 진압에 나섰다. 반란군은 멕시코 중부의 대도시인 과달라하라를 점령하여 기세를 올리면서 에스빠냐 국왕의 초상화를 떼어내서 밟아버리고 노예제도의 철폐와 유럽인 재산의 몰수 인디오 공물의 폐지 강탈한 토지의 반환 등을 엄숙히 선포했다. 진압군과 전투에 들어가긴 했으나 무장이 형편없었던 오합지졸 반란군은 정규군인 왕실군에게 간단히 진압됐다. 전투에는 명분이나 용기도 필요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무기다. 겨우 창 수십자루와 구식 총 몇 자루를 봉기군은 정규군인 식민지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막대한 사상자를 낸 채 궤멸되었고 이달고 신부는 사로잡힌 후 수개월의 고문 끝에 처형됐다. 어쨌거나 이달고 신부의 봉기에 호응하여 멕시코 남부의 미초아칸 지역의 카라쿠아로 마을의 신부인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Jose Maria Morelos) 역시 반란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희한하게도 멕시코 혁명의 불꽃은 2명의 신부가 불을 지폈다. 담대했던 모렐로스 신부는 식민지 정부군과의 여러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멕시코 영역의 상당 부분을 장악한 후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원주민들에게 분배하고 노예제도와 고문을 폐지했으며 역시 피부색에 의한 차별을 철폐함으로서 기득권자인 크리오요들의 저항에 부딪친다. 모렐로스의 전진 역시 식민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무위로 돌아가고 사로잡힌 모렐로스 역시 처형당하고 말았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6-12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 <293>멕시코의 독립1

중남미 독립사의 마지막편은 우리들의 이웃인 메히까노(mexicano/a)의 조국인 메히꼬의 독립사다. 멕시코는 영어이고 스패니시로는 메히꼬다. 멕시코에서는 국명이나 지명에 쓰인 x를 ㅎ으로 발음하기 때문이다.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이 에스빠냐를 점령하고 그의 형인 조세프가 스페인 왕위에 오른 1808년 볼리비아의 수크레가 최초로 식민지의 본국 에스빠냐에 반기를 들었으며 뒤이어서 라빠스와 끼또 멕시코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연속적인 독립의 함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멕시코 독립운동의 선구자는 미겔 이달고(Miguel Hidalgo) 주임신부다. 멕시코 시티 북서쪽 돌로레스 교구의 인권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였던 이달고 신부가 과달루페 성모의 그림을 깃발로 삼아 지역 주민 수십명을 이끌고 봉기했는데 봉기 1주일이 지나자 반란군은 5만 명으로 늘어났다. 가톨릭 신부인 이달고가 반란에 앞장서자 같은 동네인 멕시코 종교재판소가 이달고 신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이달고 신부는 이단자 배교자 성모 마리아의 순결을 부정하는 자 유물론자 방탕하기 짝이 없는 자 간음 옹호자 선동자'라고 규정했다. 멕시코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을 받고 있는 그는 달랐다. 가톨릭 사제였으나 사제로서의 맹세에 한 번도 신경써본 적이 없는 인물로 자식을 둔 데다 교회를 비판하는 프랑스 백과전서파의 책을 끼고 살았고 사제가 별로 할 일도 없으면서 밥을 먹을 수 있는 한직 정도로 생각한 사제로는 아까운 인물이었다. 이달고는 1810년9월 일군의 농민들을 이끌고 무장반란을 일으켰다. 수많은 농민들이 모여서 수만의 군중이 된 그들은 과나후아토 시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6-11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 <292>칠레와 페루의 독립

아르헨띠나가 독립을 성취한 후 산 마르띤은 상 페루(현재의 볼리비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그의 복안은 다른 데 있었다. 산 마르띤은 진정한 남미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를 평정한 후 스페인 세력의 중심지인 페루를 공략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1817년 칠레 공략 준비를 마친 산 마르띤의 군대는 안데스의 최고봉인 아콩가파 산을 넘으면서 바람과 어름과 화산재와 맞서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칠레 주둔 스페인군의 허를 찔렀고 이에 스페인군은 차카부코 전투에서 거의 전멸되는 타격을 입었다. 칠레의 산티아고 시민들은 산 마르띤을 해방자로 환영하고 칠레 총독을 제의 받은 마르띤은 이를 거절하고 칠레 독립운동의 지도자이자 자신의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인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에게 총독 자리를 양보했다. 그는 칠레에 주둔하면서 군대의 증강에 힘썼으며 이듬해 마이포 전투에서 스페인군의 잔존 세력을 궤멸시킴으로써 칠레의 독립을 공고히 했다. 1821년 칠레에서 페루를 공략할 준비에 여념이 없는 산 마르띤은 자신의 병력을 영국인 코크레인경의 함대에 승선시켜서 칠레의 발파라이소항을 출항하여 페루로 향했다. 페루 리마에 입성한 산 마르띤은 부왕을 설득하여 독립의 필요성을 납득시켰고 드디어 1821년 페루는 독립을 선언했다. 그렇지만 페루 전역이 통제 하에 든 것은 아니였다. 산 마르띤은 더 이상 혁명을 계속할 여력이 없어 부에노스로 귀환하여 일체의 정치 활동을 피했으나 초창기 공화국정부로부터 정권에 위험이 되는 인물로 집요한 감시를 당하자 프랑스로의 망명을 택했으며 그가 해방시켰던 땅을 다시 밟아보지도 못하고 72세를 일기로 1850년 망명지인 파리에서 불운했던 그의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6-10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 <291> 산 마르띤2

영국이 아르헨띠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쉽게 점령하고 중남미 전체를 삼키려는 야심을 품고 있는 동안 상황이 영국군에게 만만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영국에 점령된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민들은 비밀리에 민병대를 조직하고 라플라타 지역의 스페인 함대사령관인 산티아고 리니에르라는 프랑스인을 지휘관으로 추대한 후 영국군을 기습하여 완전히 몰아냈으며 전투 와중에서 영국 수비대장인 벨리즈퍼드 대령은 포로가 됐다. 부에노스 주둔 영국군을 지원하기 위한 본국 증원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난 후였다. 증원군은 본국에 이를 보고하고 새로운 병력을 요청했으며 기다리는 동안 지금의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 항을 점령했다. 패전 소식에 접한 영국정부는 곧바로 화이트록 장군에게 지원 병력을 이끌고 부에노스를 재공략하도록 명령했다. 화이트록 장군은 몬테비데오 항에 도착하여 현지 병력과 합류한 뒤 1만2000명의 대군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침공했다. 영국군이 좁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가지로 진입한 순간 민병대가 건물 위에서 소총과 대포로 맹공격을 퍼부어 이틀 간의 혈전 끝에 1050명의 사상자를 내고 2000명이 포로가 된 영국군은 항복했고 패잔병은 본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전 유럽이 주시하는 가운데 대영제국의 꿈을 키우고 있던 영국정부는 초반부터 큰 망신을 당한 것이다. 화가 난 영국정부는 땅에 떨어진 위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식민지 인도에서 불러들인 부대로 제3차 침공군을 계획했으나 나폴레옹의 서유럽 점령과 시기가 맞물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웰링턴의 병력을 부에노스로 보내지 않고 유럽 전선에 배치했다. 이 부대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의 나폴레옹군을 패배시키고 나폴레옹의 서유럽 점령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부대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6-08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290>남미 독립의 영웅 산 마르띤1

볼리바르보다 다섯 살이 많은 산 마르띤(Jose Francisco de San Martin. 1778-1850)은 1778년 아르헨띠나(Argentina)의 북부 미시오네스(Misiones)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스페인 태생의 장교를 아버지로 태어났다. 마르띤이 7세 때 아버지가 스페인으로 귀국함에 따라 그는 스페인의 귀족학교에 들어가 수학했으며 거기서 칠레의 대통령이 되는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와 친구가 된다. 마르띤은 11세에 군대에 들어가 22년 간 복무했으며 1808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점령 후 왕위에 있던 까를로스 4세의 아들인 훼르난두(Fernando 1784-1833. 재위 1808-1833) 7세가 쫓겨나고 나폴레옹이 자신의 형인 조세프를 황제로 즉위시키자 스페인을 떠나 아르헨띠나로 돌아와서 독립 비밀결사에 투신했다. 당시의 아르헨띠나의 상황은 어땠나. 독립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806년 1600명의 병력을 태운 영국함대가 아르헨띠나의 라 플라타(La Plata) 항구에 나타나 순식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를 점령했다. 당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던 부왕인 소브레몬테 후작은 응전할 의사가 없어 가족과 함께 내륙지방으로 도망쳐버렸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거드는 바람에 미국 식민지를 잃고 어디다 억울함을 하소연할 데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분풀이도 할 겸 타국의 점령지 몇 곳을 찝쩍거려서 가아나 벨리스 등 작은 식민지 몇 개를 건졌고 또 적국인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점령 중인 식민지에 대한 공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였다. 이러한 본국 지도부의 불편한 심중을 잘 아는 영국군 사령관 포팜은 부에노스를 점령한 뒤 전리품을 산더미 같이 영국으로 실어보냈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6-07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289> 시몬 볼리바르4

에콰도르를 해방시킨 계기가 된 피친차 전투를 승리로 이끈 볼리바르는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그 경륜이 절정에 이르렀다. 피친차 전투에서 승리하고 키토 시내로 진군해 들어갈 때 키토의 여성들은 모두 발코니에 나와 그를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좁은 길거리로 꽃다발들을 던졌다. 그중 한 여인이 볼리바르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그날 밤 열린 승전 축하 연회장에서 볼리바르는 그녀와 재회했다. 그녀는 마누엘라 사인스였으며 그 후 영웅의 곁에서 로맨틱한 생애를 빛나게 했다. 볼리바르는 자기가 해방시킨 5개국(베네주엘라. 콜롬비아. 파나마. 볼리비아. 에콰도르)의 대통령이 되었으며 각각의 공화국들은 부통령들이 통치했다. 볼리바르가 비록 5개국의 대통령을 겸임했으나 이미 내부적으로 분열의 조짐이 싹트고 있었다. 1830년 공화국 독립에 대한 아무 준비나 철학이 없이 권력과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각 지역 토호들과 반란 세력들을 제압하는데 지친 볼리바르는 더 이상의 권력을 포기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20여년 간 전쟁터를 누비고 5개국을 해방시켰으며 5개국 대통령을 역임한 영웅 볼리바르는 끊임없는 암살 음모와 더럽기 짝이 없는 권력에 대한 염증으로 그의 조국을 포기한 것이었다. 정치가로서 패배를 인식하고 고뇌에 찬 볼리바르가 죽음을 앞두고 되뇌였던 말이 있다. "이 세상에는 가장 멍청한 바보가 3명이 있다. 첫번째는 그리스도 두번째는 돈끼호떼 마지막이 나다." 볼리바르는 산타 마르타의 한 침상에서 결핵으로 임종하면서 자신의 묘비명을 직접 구술했다. "우리들은 혁명을 위해서 몸 바치는 동안 배울 시간이 없었다. 아메리카는 이제 통치가 불가능하다. 마치 혁명에 몸을 내던진 사람이 바다를 경작하는 것처럼 ~" 볼리바르가 죽음을 맞이한 날은 1830년 12월 17일 이었으며 그때가 47세였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6-06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288> 시몬 볼리바르3

에과도르의 과야낄에서 열린 두 영웅은 배석 없이 단독회담을 가졌으며 회담 후 산 마르띤은 볼리바르에게 페루의 해방을 양보하고 남미로 돌아갔다. 산 마르띤이 남미로 돌아간 후에도 회담 내용이 알려지지 않아 많은 추측이 난무했으나 두 영웅의 통치 철학이 충돌을 빚어 끝내 타협을 이끌어내지 못했으리라는 것이 가장 우세하다. 1824년 아야쿠쵸 전투에서 승리하여 페루를 해방시킨 볼리바르는 페루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북부와 갈등을 빚어오던 페루 남부 지역을 하나의 공화국으로 독립시켰으며 이 공화국은 볼리바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볼리바아로 명명되었다. 에스빠냐 식민군은 결정적인 전투인 아야쿠초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페루와 볼리바아 남미 일대를 모조리 잃었다. 볼리바르와 함께 볼리비아 해방의 주역이 된 영웅은 26세 장군 30세에 총사령관이 된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이 알칼라(Antonio Jose de Sucre y Alcala. 1795-1830) 장군이다. 베네수엘라 출신의 수크레는 페루 2대 대통령과 볼리비아 6대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로 볼리바르와 절친한 친구이자 부하였다. 수크레는 볼리바르의 명령을 받아 1822년 피친차 전투에서 승리하여 끼또를 해방시켰고 1824년 후닌 전투와 아야쿠초 전투에서 대승함으로써 페루와 볼리바아 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러한 전투에서 보여준 그의 뛰어난 전략 전술은 그를 겨우 29세 때 '아야쿠초의 대원수'란 칭호로 불리게 했다. 2번에 걸쳐서 대통령을 지내기는 하였으나 정치는 수크레에게 맞지 않았다. 1830년 역시 정치에 환멸을 느낀 볼리바르가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나라를 떠날 뜻을 품자 수크레 또한 정치를 접고 낙향할 생각이었으나 콜롬비아 남부에서 겨우 35세의 젊은 나이로 암살됐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6-05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287>중미 독립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2

1811년 베네수엘라는 독립을 선포했으며 볼리바르는 독립군 총사령관인 후란시스코 데 미란다(Francisco de Miranda 1750-1816) 장군 휘하 대령으로 독립전쟁에 뛰어들었다. 1813년 8월 3년에 걸친 전투 끝에 볼리바르는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카라카스에 입성했다. 그는 '해방자' 칭호로부터 군총사령관 최고원수 공화국대통령 등 수많은 영예스러운 칭호로 불리웠으나 스스로 가장 좋아했던 칭호는 해방자였다. 그는 독재자가 돼 베네수엘라를 통치했으나 1815년 반격을 가해온 스페인 왕실군에 패해 자마이카로 피신했다. 그는 그곳에서 중남미에 대한 깊은 분석으로 중남미 역사와 사상사에 탁월한 책인 '자마이카의 편지'를 저술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대륙이 몇 개의 국가로 나뉘어질 것을 예견했으며 중남미의 통치 철학은 강력한 자유주의 국가 국가 간의 연합을 역설했다. 1817년 볼리바르는 저항군과 5000여 명에 이르는 영국 아일랜드의 지원병을 인솔하고 독립 투쟁을 시작 1819년 혁명정부 수립을 발표했으며 1821년 까라보보 전투에서 남아있던 스페인군으로부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달성했다. 곧이어 중미 해방 투쟁에 나서 안데스 산맥을 넘어 누에바 그라나다(Nueva Granada. 현 콜롬비아)를 해방시키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다시 1822년 에콰도르를 해방시키고 콜롬비아공화국에 통합시킴으로써 북부지역은 볼리바르에 의해 하나의 공화국으로 통합됐다. 뒤를 이어 페루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투를 계속하던 볼리바르는 1822년 아르헨띠나를 독립시키고 북진중인 남미 독립의 영웅 산 마르띤 장군을 페루에서 만나게 되었고 에콰도르의 과야낄(Guayaquil) 항에서 역사적인 두 영웅의 회담이 성사됐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6-04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286>중미 독립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1

중남미 10여 개국 독립의 영웅은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 1783-1830 El libertador 해방자)와 산 마르띤이다. 중미 5개국을 독립시키고 5개국 대통령을 지낸 위대한 인물인 시몬 볼리바르는 지난 1천년 간 세계사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 100명 중 25위에 선정된 바 있다. 미국 통계에 의하면 1위는 에디슨 2위는 콜럼버스였으며 나폴레옹은 12위다. 그러나 칭기스칸이 1위이어야 했고 콜럼버스는 2위가 맞다고 본다. 1783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서 그는 대대로 부유한 스페인계 혈통 집안에서 후안 비센테 볼리바르와 마리아 콘셉시온 사이 2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볼리바르는 성장하면서 자유주의 사상가인 시몬 로드리게스(Simon Rodrigues 1769-1854)에게서 교육을 받으면서 그의 자유주의 사상에 깊이 경도되었다. 그 후 로드리게스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유럽으로 망명하면서 인문학자인 안드레스 베요의 가르침을 받다가 14세에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7세가 되던 해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2년 후 마리아 로드리게스(Maria Rodriguez)와 결혼했으나 8개월만에 아내가 병사해19세에 홀아비 돼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볼리바르는 파리에서 3년간 지적 수업을 쌓고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을 접한 후 매료되었다. 또 짧게나마 미국에 머무는 동안 남미가 해방되는 경우 미국 같은 합중국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갖게 된다. 22세 때 로마의 한 사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볼리바르는 일생을 건 중대한 선서를 하게 된다. "나는 나 자신의 명예와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내 조국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나의 마음과 나의 팔뚝은 스페인의 권력이 우리를 속박한 그 사슬을 깰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을 것이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6-03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285>사후생4

삶이란 의식이 육신을 입는 것이고 죽음은 의식이 육신을 벗는 것이다. 삶의 목적은 인간의 동물적 유아기적 의식을 인간 수준으로 성숙 확장시켜서 최종적으로 우주의식과의 합일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삶은 도전과 배움의 기회로 정신적 영적 성장의 기회이자 의식 진화의 기회다. 의식의 성장이란 선입견과 편견 고정관념을 개선하거나 깨뜨림으로써 시작된다. 인간은 엄청난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잠재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잠재능력을 사장시키고 의식의 성숙을 외면하면 의식의 퇴행으로 인해 동물과 같은 에너지 파장을 갖는다. 인간의 진화는 이미 4만년 전쯤에 완성됐으나 의식의 진화는 6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발전하지 않았다. 대부분 나이가 먹으면서 세월이 빠르다고 느낀다. 삶을 짧다고 느끼는 것은 무가치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도 새로운 것을 배우지 않고 새 경험을 쌓지 않아서 생긴 시간의 공백 때문이다. 젊을 때는 쉬지 않고 배워야 하며 경험을 쌓아야 하기에 뒤를 돌아다 볼 시간이 없다. 그들이 보낸 시간은 충실히 채워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 나이 먹은 사람은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지 않고 주어진 일만 하면서 따분한 일상을 보내기 때문에 뒤돌아보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그래서 세월이 빠른 것같이 느껴진다. 바로 허송한 세월이다. 현생을 가치 있게 산 사람에게는 다음 생에서 더 높은 차원의 삶이 주어진다. 무가치하게 산 사람은 죽음이 가까워지면 허둥대고 후회하고 원망하고 두려움에 떤다. 평생을 부질없고 무가치한 일만 좇아 다니다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기에 그렇다. 삶을 끝낼 때 부 명예 권력 등이 목적이 되었다면 생은 실패한 것이다. 왜냐하면 목표로 했던 것 중에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6-01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284>사후생3

죽음은 없다. 존재는 불멸이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는 불멸이다. 죽으면 육체는 해체돼 다른 존재를 이루고 의식은 에너지로 에너지보존법칙(열역학 제1법칙)에 의해서 역시 불멸이다. 소멸이란 없다고 본다. 죽음은 단지 하나의 과정이다. 삶은 죽음을 잉태하고 있고 죽음은 탄생을 잉태하고 있다. 생의 본질은 죽음이고 현생의 삶은 단지 죽음의 한 단면이며 죽음이란 다른 존재로 이행하는 통과의례일 뿐이다. 3차원에서 4차원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4차원에는 시공간이 없기 때문에 물질이 존재할 수 없다. 4차원에는 심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의식 수준에 따른 도약이나 추락이 있다.성숙된 의식이 내는 에너지는 짧고 밝다. 이들의 강한 에너지는 위로 향하고 미성숙하거나 동물에 가까운 의식이 내는 에너지는 길고 어둡고 약하며 아래로 향한다. 우주세계를 지배하는 지고한 법칙은 '인과율'로 각자는 뿌린 대로 거둔다. 삶과 죽음은 꼬리를 맞물고 일어난다. 계절의 순환과 동일하다. 삶과 죽음은 존재의 과정의 단계일 뿐으로 앞으로도 수많은 삶과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죽음이란 두려움이 아닌 삶의 동반자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의 삶이 가치를 갖게 되고 그래서 최선을 다해 살고 충만하게 살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죽음이 없다면 삶은 지겨움의 극치가 될 것이다. 그러니 죽음이 닥칠 때까지 단 한 순간도 의미 없이 흘려 보내지 말고 의식의 성장을 위해서 노력해라. 죽음이 없으면 삶에는 아무런 가치와 의미가 없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의식에 새겨진 경험 지식 지혜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부질없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5-31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283>사후생2

죽음학은 호스피스나 장례와는 무관한, 죽음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개설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현생의 삶에 의미와 가치 부여와 삶의 목적 인식 둘째 죽음에 대한 두려움 탈피 셋째 내생의 준비를 위함이다. 내생의 준비가 아닌 죽음에 대한 준비를 시키는 호스피스에 종사하는 분들은 임종을 앞둔 환자가 편안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죽음의 본질에 대해서 공부하면 환자가 임종 전 사후생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해줄 수 있고 또 누구나 편안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현대인의 삶에서는 목적의 상실이 공통적인 문제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문제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다. 만일 인간이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모르고 그냥 인생을 허송한다면 동물의 삶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대부분의 인간은 생을 꿈 속에서 보낸다. 대부분의 인간이 자신을 지금의 위치에서 정신적으로 도약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잠재력의 존재를 모르고 그 잠재력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생이 무의미해진다. 잠재력의 존재를 인식하고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벗어나려면 각성이 필요하다. 꿈을 깨야 하는데 우리 존재의 탐구에 의해서 가능하다. 삶의 목적은 의식의 진화 즉 정신적인 성장에 있다. 육체는 때가 되면 벗어버리는 옷과 같고 현생 즉 3차원의 공간에서 필요해 입고 있는 것이지 현생을 끝내면 불필요하다. 각자 노력해야 할 것은 의식(영혼)과 정신적인 성장이지 육체가 아닌 것이다. 대부분 현생을 살면서 부 명예 권력 등에 집착하지만 그것은 성장의 수단이 될 때나 유용하지 만일 생의 목적이 되면 불행해진다. 죽을 때까지도 그 집착을 벗어나지 못하게 돼 역겹고 추하게 늙기 때문이다. 가장 불쌍한 죽음이 이렇게 일어난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5-30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282>사후생1

전회에서 나이에 관해서 얘기했는데 사후생에 관해 논해보자. 사후생은 우리말로 '죽음'이 되는데 어감과 뉘앙스가 나빠서 앞으로는 '사후생' '변신' '제2의 삶' 등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한국인인 경우 유교 혹 불교 문화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죽음'하면 무조건 터부시하고 언급을 기피하며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원래 유교나 불교에서는 죽음을 터부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의 본질을 탐구하는 '사망학'은 가장 최근 학문이고 가장 깊이 있고 마지막 학문이다. 죽음이란 신념과 믿음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알고 모르고의 문제라고 본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각종 종교를 통하여 죽음에 대한 지식에 접해왔으나 종교는 죽음을 탐구한 적도 없고 신학교에도 '사망학'이 개설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죽음학의 선진국인 미국과 일본의 경우 죽음에 관한 탐구는 1970년대에 시작돼 미국의 경우 전체 3000여 개 대학 중 '사망학'을 강의하는 대학이 170여 개에 이르고 중등 교육 이상 기관에서 사망에 관련되어 설치된 학과는 모두 1000개가 넘는다. 이러한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정신문화 후진국인 한국의 경우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지금도 죽음 얘기가 나오면 손을 휘휘 젓는다. 죽음을 탐구해야 하는 이유는 죽음을 알아야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고 둘 다 생의 두 양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치게 되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들은 대개 다음과 같다. 1. 나는 누구인가? 2. 나는 어디서 왔는가? 3. 나는 어디로 가는가? 4.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아무 목적도 없이 살고 있는가? 5. 현생에서 부와 명예 권력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6. 죽음이 두려운가? 허무한가? 어째서 두려운가? 왜 허무한가?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5-29

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 <281> 나이의 의미

연재가 280회를 넘어섰다. 원래 계획이 1년 예정으로 300회였고 2017년 7월에 시작했으니 다음달(2018. 6) 말쯤 끝날 것이다. 이제 거의 끝나가니 끝내기 전에 조금 깊이 있는 문제에 대해서 함께 사색할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며칠 전 수업 중에 한 Sra.가 물었다. '선생님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무슨 나이요?' 보통 사람들은 삶에서 보낸 세월의 기준을 생물학적 나이에서 찾는다. 그러나 생물학적 나이는 상대를 평가하거나 가늠하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인간의 나이는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생물학적 나이(육체적 나이) 누가 입고 있는 옷에 대하여 '얼마나(동안) 오래 입으셨어요?'라고 묻는가? 오래 산 것만 가지고 따지려면 거북이나 학을 등장시켜야 한다. 무의미하고 아무런 가치 없이 허송한 생보다는 가치 있는 짧은 생이 낫다. 쓸데없는 질문이다. 2. 유의미한 나이 인생에서 가치 있게 산 세월이 존재의 실제 나이다. 허송한 세월은 생물학적 나이에서 빼야 한다. 자신의 생에서 의미 있게 보낸 세월에 따른 나이다. 참고로 가장 무의미하게 낭비한 시간이 TV를 본 시간이다. 생에서 빼라. 3. 정신적인 나이 이것이 진짜 나이다. 이 나이는 의식(자아. 진아. 영혼)의 진화와 성장 수준을 말한다. 의식의 성장은 배움과 경험 그리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축적된 지혜의 수준을 말한다. 역사상 수많은 명언이 있었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네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 이상이 없겠다. 이 말은-보통 아시다시피 그리스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말이 아니고-그리스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의 현판에 쓰여 있는 글이다. 하나만 더 보탤까?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가 임종의 자리에서 한 말이다. '내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 새겨 들을 말이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2018-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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